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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 대해 알아보자

by dalmooni 2023.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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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서울의 봄' 공식 포스터

 

 

다 아는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절름발이가 범인인걸 알고도 영화에 임하는 비장함이 있습니다. 실제 알고 있는 역사의 장면들을 소환해 대조하고 반전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반전을 기대해 보는 다소 안타까운 관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렇게 집중해서 보게 된 스토리 이외의 소소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전선을 간다

관람한 지 이미 한 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마지막 엔딩크레디트의 반란군사진과 비장하리만큼 구슬프던 군가 '전선을 간다'가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전선을 간다'라는 곡은 군시절 익혔던 군가 중에 '최후의 5분'과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미있는 건 곡이 나온 해가 12.12 군사반란이 있었던 1980년대 초반이었으며, 군가 및 진중가요 공모에 출품되어 가작에 선정된 이곡의 작곡자가 '태권 V'의 주제가를 작곡한 최창권 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찾아보니 최창권 님의 세아드 님도 모두 음악을 하셨는데 '세월이 가면', '사랑은 유리 같은 것', '연극이 끝난 후' 등 제가 그 시절 좋아하던 노래들을 만드신 음악가 집안이셨네요. 

 

2. B2벙커

대한민국 군사 벙커의 상세위치와 정보 등은 2급 군사 비밀이어서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중 B1, B2, B5벙커 정도가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된 바 있는데 영화 내에 지하벙커로 나오는 B2벙커가 바로 용산 국방부 청사 지하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보안'사항이 아니 된 이유가 재밌습니다. 2022년 윤 대통령 당선자가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국방부와 합참 지하벙커 위치와 지하 통로까지 친절하게 짚어 주셔서 군 관계자들을 당혹게 했습니다. 군에서는 수도방위사령부와 합참의 지하벙커를 각각 'B1 문서고', 'B2문서고'라는 위장 명칭으로 부르며 국가중요시설 '가'급으로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어째 거나 영화에서 육군본부가 B2벙커를 버리고 지휘부를 옮겼을 때 반란군이 이겼다는 걸 확신하며 쾌재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육본벙커이니만큼 아주 견고하게 설계되었고 1개 소대병력만으로 이틀은 버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휘부가 버티면서 그동안 지원병력이나 주한미군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반란군도 그대로 진압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아쉬움이죠. 그 당시 노태우가 동원한 9사단은 한미연합사령부 소속이었고 한미연합사령부의 허가 없이 최전방 부대를 쿠데타에 동원한 상황이라 주한미군사령관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건 자명합니다. 

무능한 군수뇌부가 허둥대며 벙커를 버리고 수방사로 도망치는 장면에서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을 다시금 되뇌게 합니다. 참고로 영화는 조선대학교 본관 뒤편 지하대피소를 B2벙커로 연출해 촬영했다고 하네요.

 

3. 그때 그 사람들

한 초등학교가 '민주시민 역량 강화'라는 목적으로 단체 관람을 준비했다가 특정집단의 민원으로 관람을 취소한 사건을 보며 역사적 사실을 교육하는 것조차 아직 이념적이고 정파적인 논란이 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합니다. 올바른 역사를 교육하지 않는 일본의 아이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전범국이었던 자국과 미국이 한 편이었다고 믿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남에 이야기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비록 12.12군사반란의 주역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렸고 3대가 부를 누리고 있으니 우리 아이들에게 의가 아닌 것에 맞서는 용기와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른으로서 미안한 일입니다. 

해서 그들의 이야기보다는 불의한 반란에 맞서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분과 가족분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이야기하고 기억해 드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적어도 그분들의 이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3대가 명예와 바꿔 누린 '부'보다 강하고 영예로운 '역사'로 남아 누군가에게 용기와 귀감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 - 이태신(정우성)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 1951년 8월 향로봉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참전. 926 고지 탈환에 전공. 중령 시절 맹호부태 1진으로 월남전 참전.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과 제26보병사단장을 거처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 임명.

12.12군사반란 시 이미 수방사의 왼팔과 오른팔이라 할 핵심병력인 30 경비단과 33 경비단을 하나회인 장세동과 김진영이 장악. 무능력하고 순진했던 진압군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9 공수마저 회군하며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등 휘하의 모든 부대원을 끌어모은 100여 명과 전차 4대만으로 보안사에 일격을 준비하지만 이미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현(극 중 김의성)의 투항지시로 사실상 마지막 저항은 실패로 돌아가며 자신의 부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혼자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본분을 다하기 위해 저항한 참군인이었으나 체포 후 서빙고에서 45일간 고초를 받고 강제예편되었습니다. 분개한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과음으로 별세하시고 서울대 자연대 수석으로 입학한 외동아들도 집을 나선 지 1달 만에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는 일을 격은 끝에 장태완은 2010년 7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합니다. 장태완의 부인은 2년 뒤 유서를 남기고 투신 사망하셨습니다..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 - 공수혁(정만식)

1949년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 한국전쟁 당시 1 연대 소대장으로 참전. 1971~1974년 제5보병사단장을 거처 1967년 제1공수특전단장, 1975~1979년까지 육군특수전사령관을 지내며 1976년 판문점 미루나무사건의 보복작전과 1979년 부마항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관여. 

1979년 12.12 군사반란 시 수도권에 있던 1,3,5,9 특전여단 중 9 특전단을 제외하고 모두 하나회 소속으로 반란군에 가담한 사실을 파악하고 9 공수 윤흥기 준장에게 보안사와 30 경비단 공격 지시. 군 통신망을 감청한 보안사를 통해 공격을 알게 된 반란군은 3 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에게 정병주 체포를 지시합니다. 3 공수 내에 사령관실이 있는 관계로 직속전투병력이 없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총격전 끝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이 하나회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신으로 교전 중 전사합니다.

보안사에 끌려간 후 고초를 격고 조사 중 과다출혈로 병원으로 이송 수술 후 강제 예편됩니다. 1987년 11월에는 김진기 전 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등 행보를 보였지만 1998년 실종된 지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의문의 사체로 발견. 정병주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유족들의 뜻을 따라 묘비명이 없는 백비로 내용 없이 이름만 적혀있다고 합니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김오랑 소령 - 오진호(정해인)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했으나 학비 문제로 인해 등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5년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입교했습니다. 1970년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파병. 육군 3 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으로 특전사와 연을 맺었습니다. 육군대학 졸업 후 소령으로 특전사에 복귀. 군에서 인정받는 엘리트장교로 정병주 육군특수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차출됩니다. 

사건 당일 저녁, 김오랑 소령은 아내 백영옥에게 ‘오늘 저녁도 못 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라는 마지막 통화를 마지막으로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도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홀로 분투하다가 가슴과 배에 총탄 6발을 맞고 현장에서 전사합니다. 시신은 직후 특전사 뒷산에 가매장되었으나 이후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로 옮겨졌다가 1980년 2월 28일 정식으로 제29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고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던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도 충격으로 완전히 실명했다고 합니다. 1990년 12월에 노태우 정권하에서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고 이듬해에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2022년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재심결과 김오랑 중령의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했습니다. 적과의 교전 또는 무장 폭동반란 등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한 사망이므로 전사가 적합하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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